이상희, 윤신영 – 인류의 기원

과학책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한국어로 글을 쓰는 저자는 매우 반가운 존재다. 물론 수로 따지자면 훌륭한 외국 저자들의 수가 압도적일테고 그만큼 좋은 책도 많을 것이며 번역서의 품질도 예전과는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좋아지기는 했지만, 번역서보다 처음부터 한국어로 쓰여진 글이 훨씬 쉽게 잘 이해된다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박진영의 공룡열전이 그랬고, 김산하의 비숲이 그랬다. 안 그래도 인류의 진화에 대해서 한 번 수박 겉핥기로나마 공부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 어언… 몇 년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도무지 손댈 생각을 하지 않는 게으름을 하늘이 딱히 여기시고 이런 책을 내려주신 것이 분명하다.

‘인류의 기원’ 은 꽤나 포괄적인 제목이다. 조금 더 구체성을 띈 제목이면 어땠을까. 그렇다고 ‘하룻밤에 읽는~’ 뭐 이런 식의 문구가 들어가는 것은 곤란하겠지만, 인류의 진화를 바라보는 저자들 나름대로의 관점을 드러낼 수 있는 제목이면 더 좋았을 것 같다.

책의 저자인 이상희 교수는 서울대와 미시건대학에서 공부를 했고 현재는 캘리포니아대학 리버사이드 인류학과의 부교수로 재직 중이다. 학부에서 고고미술사학을 하고 대학원에서 생물학적인 측면이 강한 고인류학을 공부했으면 그게 적잖이 간극이 있었을텐데… 그 춥다는 미시건에서 고생하셨겠다. 공저자는 과학동아 윤신영 편집장. 그런데 독자 입장에서 볼 때 글의 주인은 이상희 교수로 느껴진다. 사이언스북스의 블로그 글에 설명이 되어있긴 한데, 편집자와 공저자의 차이는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잠시 들었다. 잘 알려진 예를 들면 레이먼드 카버가 생전에 낸 책들은 레이먼드 카버의 단독저서인가 레이먼드 카버와 고든 리시의 공저인가, 하는 식의.

책의 내용은 제목처럼 인류의 진화 전반을 다 다루고 있다. 식인종 이야기에서 현생 인류의 진화까지. 내가 인류학을 제대로 공부한 적은 없으니 이 책에서 다루는 내용들이 앞으로 내가 인류학의 전반을 생각할 때 기준점이 될 가능성이 높다. 아는 이야기도 간혹 있고, 어렴풋이 들었던 이야기에 대한 자세한 설명도 있었다. 중간에 잠시 생각을 해봐야 하는 부분은 좀 있었지만 글이 어렵다거나 골치아프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학술적인 내용,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예, 개인적인 경험 등이 적절히 잘 어우러져 있어서 책장이 술술 잘 넘어간다. 훌륭한 교양과학서. 사진이 많이 들어있는 것도 좋은 참고자료. 뒤의 저작권이 대부분 Creative Commons 로 되어 있는 걸 보면 위키피디아의 사진들을 많이 사용한 듯.

이하는 읽으면서 들었던 의문들과 약간의 코멘트들.

  • p. 66: 출산시에 벌어지는 골반의 관절은 어느 부분일까. 원래는 장골, 좌골, 치골로 되어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사람의 골반은 어쩐지 커다란 쟁반(?) 모양의 뼈 하나로 느껴지곤 한다.
  • p. 78: 초기 인류가 골수와 뇌를 먹었다는 이야기에 어.. 그걸 먹는 동물이 없었나? 하이에나가 사냥한 짐승의 뼈를 부수어 먹었던 것 같긴 한데, 생각해보니 하이에나도 뼈를 즐겨 먹었을 것 같진 않다.
  • p. 100: 멜라닌이 피부의 어느 부분에 위치하고 있는지, 그리고 비타민D 합성은 어디서 일어나는 일인지 그림이 하나 있으면 좋았을 것 같다. 멜라닌과 비타민D 합성은 왜 공존할 수 없는가 하는 단순한 의문.
  • p. 114: 3 대가 같이 산다는 사실이 변하지 않았다고 서술하고 있는데, 인과관계가 있는 건지 상관관계만 있는 건지 설명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내가 보기에 필연적인 것 같지는 않은데. 평균수명이 늘어나는 것은 의학의 발달 때문일테고, 결혼 및 출산이 늦어지는 것은 경제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 같다.
  • p. 125: 농경과 대규모 전쟁으로 인해 사망률이 높아졌다는 서술은 핑커의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의 관점과는 배치된다. 수렵채집부족에서 폭력에 의한 사망이 30% 정도라고 했던 걸로 기억. 9 장의 참고문헌을 살펴보니 농경과 건강에 대한 문헌은 여럿 보이는데 핑커의 주장을 반박할 수 있을 만한 문헌은 안 보이는 것 같다. 핑커의 책에는 수렵채집생활에서 농경생활로 옮겨오면서 폭력이 줄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문헌 목록이 빼곡함.
  • p. 215: 학명처럼 정해진 규칙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보통 유전자는 이탤릭체, 그 유전자에서 만들어지는 단백질은 일반글씨체로 쓰는 것 같다. ‘FOXP2 유전자’ 는 ‘FOXP2 유전자’ 로 표기하는 게 관례에 맞는 듯.
  • p. 216: 석기로 고기나 질긴 식물을 자를 때 이로 꽉 물어서 고정을 시킨다 하더라도 얼굴에서 먼 쪽에 놓인 부분을 자르려고 시도했을 것 같은데, 미끄러지면 이빨에 흔적이 남는다는 것은 납득하기 힘들다. 치아에 있는 흔적은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것 아닐까? 논문을 보면 되겠으나.. 통과.
  • p. 268: 성별이 사회문화적인 개념이라는 건… gender 를 이야기하려고 했던 걸까?
  • p. 297: 후생유전학과 획득형질의 유전은 상당히 다른 얘기일 것 같은데?
  • p. 299: 원숭이가 무엇이 아쉬워서 사람이 되려고 하겠냐는 말 다음에 ‘그건 농담이고요.’ 가 붙는데 이 문장은 빼는 편이 더 잘 읽히는 것 같다. 앞의 진화에 대한 제대로 된 설명 전체가 농담이라고 하는 줄 알고 순간 헷갈렸다.
Advertisements


카테고리:신생대, 현생, 의견, 인류, 인류학

태그:

1 reply

Trackbacks

  1. 이상희, 윤신영 – 인류의 진화: 독후감 part 2 | 아주 옛날에는 사람이 안 살았다는데

답글 남기기

아래 항목을 채우거나 오른쪽 아이콘 중 하나를 클릭하여 로그 인 하세요:

WordPress.com 로고

WordPress.com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Twitter 사진

Twitter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Facebook 사진

Facebook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Google+ photo

Google+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s에 연결하는 중

%d 블로거가 이것을 좋아합니다: